2025년 11월 15일 전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서 열린 호남정치학회 발표에서는 냉전기 정상외교 사료 분석부터 21세기 기술 패권 경쟁, 그리고 미국의 대중 해양안보 인식에 이르기까지 국제정치의 ‘변화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연구 등이 발표되었다. 이 연구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위협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에 따라 어떤 전략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오늘의 국제 질서를 전망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박아름 교수(동국대학교)는 1984년과 1986년 김일성과 동독 호네커의 정상회담 비공개 기록을 토대로 냉전 중후반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인식 변화를 추적한다. 당시 미·소 군축회담이 본격화되며 양극 체제가 재편되는 가운데, 북한과 동독은 자신들이 ‘서방·동방의 최전선’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김일성은 남한에 배치된 핵탄두로 인한 직접적 안보 부담을 강조했고, 호네커는 서독으로부터의 인구 이탈과 나토의 전진 배치를 ‘유럽의 가장 위험한 전초기지’라고 표현하며 현실적 불안에 공감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정상의 인식이 단지 안보 평가에서 끝나지 않고, 1984년에는 사회주의-비동맹 연대와 중소 갈등 중재 같은 국제정치적 ‘이상’을 논의했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중국의 대미 접근을 신식민지화 위험으로 규정하며 동독이 소련과 중국 사이의 관계 조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네커 역시 이에 공감하며 중국의 재편입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986년 회담에서는 이러한 국제연대 구상이 사실상 사라지고 각국이 자체 생존 전략에 집중하는 현실주의적 접근이 강화되었다. 이는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이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한나 박사(서울대학교)는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21세기 핵심 쟁점을 다룬다. 미국의 제재가 원자력 산업으로 확대되자 중국은 단순한 수출통제 대상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무기화 속에서 자립·대체 네트워크·비서방 협력을 결합하는 복합 전략을 채택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2018년 이후 중국 핵기업을 제재하고 핵심 장비 수출을 금지하며 원전 공급망을 동맹 중심으로 재편했다.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제재는 기술 발전을 늦춰야 하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를 계기로 자주 개량 기술(예: 화롱 1호)을 발전시키고 러시아 및 1대1로 국가와의 협력을 확대해 독자 원자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대응을 ‘구조적 대응 능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냉전기의 중국이 고립 속 자력갱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달리, 오늘의 중국은 기술 축적·자본·외교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기존 네트워크를 대체하거나 재편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인 파키스탄 원전 프로젝트에서 중국은 100년 단위의 연료·운영 협력을 제공하며 수입국을 장기적 네트워크에 편입시켰다. 이는 기술·경제·외교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영향력 행사 방식이자, 미국 중심 질서에 대한 실질적 대안으로 평가된다.
장성일 박사(동북아재단)는 국제정치의 구성주의 시각에서 미국의 대중 해양안보 인식이 어떻게 ‘안보 문제화’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중국 해군의 원양 진출, Impeccable호 사건(2009), 남중국해 도서 매립과 군사기지화 단계에서 미국 내부에서는 중국을 ‘해양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는 담론이 누적되었다. 이는 행정부와 의회는 물론 전문가·언론 담론 모두에서 일관되게 강화되었다.
특히 2010년 힐러리 국무장관의 “남중국해 개입 가능성” 발언 이후, 의회는 중국의 행동을 “항행의 자유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며 ‘특별한 조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는 안보 문제화의 핵심 요건을 충족시키는 언어적 전략이었다. 2015~2017년 중국의 군사기지화가 가속되자, 미국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으며, 이는 단기적 사건이 아니라 수년간 축적된 담론의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연구들은 냉전기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인식 변화, 21세기 기술 패권 구조 재편, 해양안보 담론의 사회적 형성과정을 각기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국가가 위협을 해석하는 방식이 국제정치의 실제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북-동독 회담에서의 인식 변화, 중국의 기술 자립 전략, 미국의 해양안보 담론 모두 위협의 구성·재구성 과정을 통해 국가전략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 연구들은 국제정치를 단순한 힘의 경쟁이 아니라 인식·기술·네트워크·담론이 결합된 복합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는 공통된 시사점을 제공한다.
호남정치학회에서 발표된 연구들은 한국 외교·안보 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냉전기 문서 분석은 인식의 작은 변화가 국가 간 협력·갈등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한반도 정세를 해석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둘째, 기술 패권 경쟁 국면에서 한국 역시 기술 자립과 대외 협력의 균형을 정교하게 조정해야 한다는 교훈이 제시된다. 셋째, 해양안보 담론 연구는 위협 인식의 사회적 형성과정이 정책 변화를 이끄는 힘을 지닌다는 점을 보여주며, 한국 또한 동아시아 안보 질서 변화 속에서 담론적 대응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호남정치학회 학술회의] 1980년대 냉전의 균열에서 21세기 기술경쟁까지: 세계 질서를 재구성하는 세 가지 시선
엄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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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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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독 정상외교, 미·중 원전 네트워크, 미국의 해양안보 담론이 보여주는 국제정치의 다층 변화
출처: 호남정치학회
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