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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안보정책, 누구의 선택인가: 국방비 추이로 본 국내정치의 영향력

엄기홍 기자 | 2025.11.04 | 조회 23

진보정부가 국방비 더 늘렸다? 이념적 성향과 방위비의 상관관계를 검증하다

출처: 정치·정보연구

출처: 정치·정보연구

2025년 10월 31일 발표된 고봉준 충남대 교수의 연구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문재인 정부까지의 국방비 추이를 분석해 정부의 이념적 성향이 국방비 증가율에 영향을 주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이 연구는 외부 위협이 국가 안보정책을 결정한다는 신현실주의 이론에 대해 국내적 요인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하며, 한국의 안보전략이 과연 합리적으로 수립되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고봉준 교수는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 중 특히 신현실주의(neo-realism)의 전제를 검토하며, 국가 안보정책이 오로지 외부 압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한다. 전통적으로 신현실주의는 국가가 국제 체제 속에서 상대적 지위를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안보를 추구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연구는 국내 정치, 권력구조, 정부의 이념, 경제 상황과 같은 요소들이 안보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려는 시도를 한다.

연구의 핵심은 1998년 김대중 정부부터 2022년 문재인 정부까지의 국방비 증가율을 각 정부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비교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진보 성향,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보수 성향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르면, 진보 정부의 연평균 국방비 증가율은 각각 6.1%, 8.86%, 6.28%로, 보수 정부의 5.22%(이명박), 4.13%(박근혜)에 비해 더 높은 수치를 보였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11조 원 이상의 국방예산을 증액하며, 가장 큰 총액 증가폭을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추세가 기존 정치경제 이론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나리즈니(Narizny)의 연구에 따르면, 진보 정부는 고소득층에 대한 과세에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국방비 증액에 적극적이며, 장기적으로 사회복지 확장과 국가 자원 추출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 한국의 사례에서도 진보 정부가 자주국방 강화, 방위력개선비 비중 확대 등의 정책을 주도해 온 점이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반면, 북한의 위협 변화와 국방비 증액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북한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총 여섯 차례 핵실험을 단행했고,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 도발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북한의 위협이 고조된 시점에도 국방비 증가율이 오히려 감소하거나 큰 폭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위협-대응의 선형적 모델을 전제로 한 신현실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또한, 국방비 증액을 설명하는 변수로 자주 거론되는 '권력구조', 즉 대통령과 국회의 지배 정당이 일치하는 단점정부 여부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론상 단점 정부는 자원 동원 능력이 크기 때문에 국방비 증액에 유리해야 하나, 한국의 사례에서는 권력구조와 증액 사이에 일관된 상관관계가 관찰되지 않았다.

경제 상황도 유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IMF 위기(1997), 글로벌 금융위기(2008), 코로나19 팬데믹 등 국내총생산(GDP)의 급변 요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평균적으로 2.2%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경제 성장이나 경기 침체가 국방비 결정에 주된 변수는 아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연구는 결국, 한국의 국방비 결정과 안보 정책이 국제 체제의 압력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정치의 성향,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인구 구조 변화 같은 요인들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고령화가 심화된 국가일수록 국방비 지출을 꺼리고, 사회복지 수요가 커지면서 안보 전략의 합리성 확보가 어려워진다는 노인평화론(geriatric peace theory)의 함의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이 연구는 한국의 국방비 추이가 단순히 외부 위협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라, 정부의 정치적 성향과 국내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진보 정부가 보수 정부보다 국방비를 더 많이 증액한 점은 기존 통념을 뒤흔들며, 향후 안보 전략 논의에서 국내 정치의 함의를 보다 정교하게 반영해야 함을 시사한다.

향후 입법적 차원에서는 국방비 편성 시 보다 장기적이고 일관된 전략평가 시스템이 요구된다. 정권 교체 시 무기체계 도입이 흔들리거나, 정책 기조가 설명 없이 변경되는 문제는 안보의 정치화를 심화시키고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 프랑스처럼 민간 전문가를 포함한 종합적인 국방개혁 검토체계를 사전에 입법화하고, 합의 기반의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인구절벽과 고령화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국내 여건을 반영하지 못하는 안보 전략은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이 연구는 단지 국방비의 많고 적음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안보 정책이 진정으로 ‘합리적’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이었다.

논문: https://doi.org/10.15617/psc.2025.10.31.3.31
유튜브: https://youtu.be/RUxgKP_Ah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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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