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에서 1950년까지 한국 정치의 기초를 마련한 제헌국회 시기는, 오랫동안 폭력과 억압, 민주주의 후퇴의 사례들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이 연구는 같은 시기를 다른 관점에서 조명한다. 제도 형성과 운영 과정에 주목해, 한국 민주주의가 어떠한 방향과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는지를 입법·행정·사법의 상호 작동 속에서 분석한다. 제헌헌법 제정, 5·10 선거의 성립, 국회의 견제 기능 등이 어떻게 초기 정치체제를 형성했는지가 핵심이다.
제헌국회 시기 한국의 정치체제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오랫동안 단일한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존 연구는 제주4·3 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파괴, 국회의원 체포 등 폭력과 억압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 시기를 규정했다. 특히 ‘6월 공세론’은 1949년 6월을 기점으로 민주주의가 사실상 붕괴했다고 주장하며, 제헌국회를 권위주의·극우 반공 체제의 출발점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 연구는 그러한 해석이 제도 형성과 운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연구는 제헌국회 시기를 제도주의 정치사의 관점에서 재평가한다. 제도주의 관점은 정치체제를 단일 사건의 결과로 보지 않고, 다수의 기관과 사회적 행위자가 상호작용하며 형성하는 장기적 규칙 체계로 파악한다. 여기서 ‘정치체제’는 권력 구성, 정책 결정 구조, 제도적 규범과 행태까지 포함한 포괄적 개념이다. 따라서 해당 시기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건 중심 서술이 아니라, 제도적 ‘게임의 규칙’이 어떻게 설계되고 실행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헌국회는 5·10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이 선거는 유엔 감시 아래 실시되었으며, 임시민주정부·인민위원회 노선과 자유선거 노선 간의 대립 속에서 자유선거가 한반도에서 실현된 사례였다. 임시위원단은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이동의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등 선거의 기본 요건을 적극적으로 점검하며 독립적 관찰을 수행했고, 결국 유권자의 자유 의지를 유효하게 반영한 선거였다고 결론내렸다. 이는 당시 분단 상황, 미군정의 행정 운영, 북한의 정치 체제 형성과 비교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제헌헌법의 제정 과정 또한 정치체제 형성의 핵심 사건이다. 제헌헌법은 권력분립, 대의제, 법치주의, 자유권 보장을 명시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구조를 제도화했다.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경영 참여권 등 사회경제적 권리는 국회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을 거쳐 포함되었으며, 이는 당대 정치세력의 이념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헌법 초안 논쟁 과정에서 단일 정당에 의한 일방적 결정이 아니라 다양한 의원들의 발언과 협상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해당 시기가 ‘독재적 체제’로만 규정되기 어렵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입법 과정에서도 다수의 중요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농지개혁법, 반민족행위처벌법, 귀속재산처리법 등 일제 잔재 청산과 사회 구조 개편을 위한 법률이 국회를 중심으로 제정되었다. 행정부는 때때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국회의 견제를 일방적으로 무력화하지는 못했다. 국정감사와 감찰위원회 같은 수평적 책임성 장치가 존재했고, 실제로 정부를 비판하고 정책 집행에 관여하는 사례가 확인된다. 이는 사법부와 감찰위원회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행정부의 권력 집중을 일정 부분 제어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이 연구는 또한 기존 평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6월 공세론을 재검토한다. 소장파 의원 체포, 반민특위 파괴, 김구 암살 등 사건들이 민주주의의 급격한 붕괴를 의미한다는 주장에 대해, 이러한 사건들이 당시 정치체제 전체를 설명할 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사건 자체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것은 아니었으며, 제도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작동하며 정부 견제와 정책 논의를 지속했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한 제헌국회의 구성 또한 단일 정치 세력이 장악한 구조와는 거리가 있었다. 한국민주당, 독촉계, 무소속, 중도 성향 인사 등이 고르게 분포했고, 이는 국회 내부에서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입법 과정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자유선거가 실제로 경쟁적이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제헌국회 시기의 평가를 위해서는 해당 시기를 단순히 ‘권위주의적 시작’으로 바라보는 것에 그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연구는 제도적 민주주의가 실험되고 운영되었으며, 정치기관들이 상호 견제를 수행하고 사회적 갈등을 제도 안에서 처리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존재했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은 이후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제도적 규범과 절차가 점차 정착되는 과정에서 제헌국회가 갖는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제헌국회 시기의 정치체제는 폭력적 사건과 제도적 진전이 공존한 복합적 시기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해당 시기를 민주주의 붕괴의 역사로만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으며, 정치제도의 성립과 운영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제도주의 정치사 관점에서 보면, 제헌국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를 결정한 초기 단계로 기능했으며, 이후 헌정 질서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관점은 향후 제도 개혁과 민주주의 평가에서도 유효한 분석 틀을 제공하며, 한국 정치발전의 장기적 경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논문: http://dx.doi.org/10.35656/JKP.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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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 혼란 속에서 민주주의 구조를 세우다
엄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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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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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50년 제헌국회 시기의 제도 형성과 정치체제 재평가
출처: 한국정치연구
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