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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제3자 변제'는 어떻게 일본 외교의 연료가 되었나

엄기홍 기자 | 2025.09.06 | 조회 12

아베·포스트 아베 시대 일본 외교의 맥락에서 재해석된 윤석열 정부의 대일 결정

출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출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 해법으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 결정은 단순한 외교적 선택을 넘어, 아베 이후 일본 외교의 고착된 구조와 상호작용하며 등장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일본 정부가 오랜 기간 고수해온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외교 원칙, 그리고 과거사 문제의 책임을 한국에 전가해온 기조 속에서 이 해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윤석정 교수는 논문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제3자 변제가 아베·포스트 아베 시대 일본 외교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 산물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일본 외교가 과거사 문제를 국제법의 보편 원칙인 'pacta sunt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 한다)'에 귀속시키며, 한국 정부가 과거사 갈등을 단독으로 해결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조를 고착화한 점에 주목한다.

아베 신조 총리 시절의 외교 전략은 명확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기점으로,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립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고,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 재검토에 나서자 대화조차 거부했다. 포스트 아베 시대의 스가, 기시다 정권도 이 기조를 계승하며, 한국이 먼저 현금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대일 외교의 재정비에 나섰다. 출범 직후부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밝히며, 미래지향적 협력을 통한 신뢰 회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관계 정상화의 전제로 고수했고, 결국 한국이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2023년 3월 6일, 한국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제3자를 통한 변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핵심은 일본 기업이 아닌, 한국 민간의 기여로 배상을 진행한다는 점이다.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를 '우리의 주도적이고 대승적인 결단'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은 환영 입장을 내면서도, 미래 정권이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윤석정 교수는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측면을 짚는다. 하나는 일본 외교가 실질적 해법 없이 구호만 반복하는 '무대책의 대책' 상태였다는 점, 다른 하나는 윤석열 정부의 선제적 결정이 결과적으로 일본 외교에 실질적 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한일 정상회담이 재개되었고, 2023년 8월에는 한미일 정상회담이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되었다. 세 정상은 '정신', '원칙', '공약'이라는 문서를 통해 군사·기술·경제 분야의 협력을 구체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 흐름은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한미일 협력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일본의 변화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외교적 성과를 창출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대가로 한국은 과거사 문제의 책임을 단독으로 짊어지게 되었고, 일본은 본질적 사과나 배상 없이 외교적 이득을 얻는 구조가 형성되었다는 평가도 병존한다.

윤석정 교수의 분석은 단순히 제3자 변제라는 정책 결정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외교 정책이 상대국의 외교 기조, 전략, 구조적 제약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윤석열 정부의 결정은 아베 이후 일본 외교의 고착된 원칙-'한국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구호-에 대답하는 방식이었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외교를 다시 움직이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2025년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천명하며, 대일 투 트랙 전략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베 시절부터 이어진 외교 기조의 관성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와 실리 추구를 분리하려는 한국 정부의 접근이, 유연성 없는 일본 외교에 다시 부딪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했던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은 외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제는 새로운 정부가 이 미로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엄기홍 기자 | theaipen.officia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