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말 속에 담긴 '평화', 시대 따라 달라졌다

임희수 박사(연세대)는 1948년부터 2022년까지 역대 대통령 연설문에서 ‘평화’와 관련된 텍스트를 분석해 대통령별 평화 인식의 공통점과 차이를 도출했다. 이 연구는 텍스트 마이닝 기법을 활용해 한국 정치 수사학의 장기적 변화를 실증적으로 추적하며, 남북 분단이 대통령 평화관 형성에 미친 구조적 영향도 밝혔다.

한국 현대사에서 ‘평화’는 단지 전쟁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남북 분단, 냉전 구도, 핵 위협, 민주화 이행 등 복잡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대통령들이 말하는 ‘평화’는 그 자체로 외교·안보 전략, 대북정책, 정치적 가치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대통령의 공식 연설문이 시대의 외교안보 전략을 반영하는 1차적 자료라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토대로 장기 시계열의 평화 담론 변화를 규명하고자 했다.

연구 대상은 총 8,980건의 연설문 중 ‘평화’를 언급한 3,706건이며, 이를 바탕으로 텍스트 마이닝 기법을 적용해 대통령별 담론 구조를 비교했다. 분석은 빈도 분석, TF-IDF(역문헌빈도), 네트워크 분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한 단어 출현을 넘어서 단어 간 관계망을 구축하고 주요 개념의 연결 구조를 파악했다.

분석 결과, 모든 대통령은 다음의 5가지 공통된 평화관을 공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국제 협력 및 외교적 연대를 통한 평화 추구. 둘째, 통일 지향적 시각. 셋째, 경제 발전과 번영을 통한 안정적 질서 구축. 넷째, 국가 안보 및 생존 보장에 대한 강조. 다섯째, 민주주의와 자유 가치의 보호 및 확대이다.

그러나 대통령별 담론에는 시대적 맥락과 정치환경에 따라 뚜렷한 차별성도 나타났다. 예컨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은 강한 반공 의식과 국방력 강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남북 협력과 포용 정책, ‘햇볕정책’과 같은 유화적 접근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핵화와 남북·북미 정상회담과 같은 외교적 사건을 평화 담론의 조건으로 전제하였다.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명확히 시각화되었다. 김대중의 담론은 ‘협력’, ‘통일’, ‘북한’ 등의 연결어가 중심에 위치한 반면, 박근혜는 ‘통일’과 ‘기회’, ‘미래’에 집중되었고, 문재인은 ‘한반도’, ‘비핵화’, ‘정상회담’ 등의 국제정치 이벤트 중심 단어들이 핵심에 자리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대통령의 평화 언어는 ‘안보’에서 ‘삶의 질’, ‘사회 안정’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는 전통적인 외교안보 관점이 국민 중심의 가치로 확장되는 변화를 시사한다. 이처럼 대통령의 평화 인식은 국내외 환경, 특히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며 재구성되었다.

연설문에 나타난 담론의 중심성 분석에서도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반공’, ‘국방’ 등의 용어가 주요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 ‘세계화’ 등이 높은 가중치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포용’, ‘대화’가 강조되었고, 문재인은 ‘비핵화’, ‘종전선언’ 등의 외교 이벤트 중심 용어 사용이 두드러졌다.

이 연구는 단지 대통령의 연설을 정량적으로 요약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작동하는 정치·사회 구조와 연계해 평화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대통령 연설문이라는 ‘제도화된 언어’를 통해 국가의 전략적 기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학술적 활용 가능성이 높다.

이 연구는 대통령의 평화 담론이 시대의 요구와 구조적 조건에 따라 변화해왔음을 실증적으로 입증한다. 향후 대통령의 연설문 분석은 특정 이념이나 정책 지향을 넘어서, 한국 정치의 메타서사와 담론적 전환을 이해하는 도구로 더욱 활용될 수 있다. 특히 남북관계의 변화, 국제 정치환경의 재편 등 다양한 변수 속에서 미래 대통령의 평화관이 어떻게 구성될지에 대한 예측과 정책 설계에도 기초 자료로 기능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정치적 담론 분석의 정량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정책 커뮤니케이션 연구에도 중요한 기여를 한다.

논문: http://doi.org/10.22539/culpol.2025.12.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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